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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구 기자의 對話] “오늘도 모르겠습니다, 시가 누구인지…”(동아일보 2018.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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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4
조회
464

[이진구 기자의 對話] “오늘도 모르겠습니다, 시가 누구인지…”

 

등단 60주년 맞은 시인 고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거야’란 말이 이토록 딱 맞는 사람이 있을까. 그에게는 나이도, 등단 60주년이라는 의미도, 걸어왔고 걸어갈 시간의 한 지점에 불과한 것 같았다. 경기 수원시 자택에서 만난 시인은 “아직도 일주일을 읽어야 끝나는 구비서사시가 존재하는데 내가 다작일 수는 없다”며 “앞으로도 쓸 것이 줄줄이 이어져 있다”고 말했다. 수원=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고은, ‘순간의 꽃’에서 

 

누군가를 만날 때, 이름만으로 자신을 소개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무리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아도 회사 이름이나 직책을 붙이지 않으면 자신을 표현할 수 없는 사람들. 

“고은입니다.”  

굳이 설명이 필요할까. 그 이름에 우리 현대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안겨 있는 사람. 어쩌면 그에게 시는 이런 질곡 중의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올해로 등단 60주년을 맞았다. 그가 올라가면서 보지 못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눈 내린 10일, 자작나무 숲 너머 그의 집을 찾았다.  

 

―1958년 시 ‘폐결핵’으로 등단하신 지 올해로 60년이 됐습니다.

 “내가 어릴 적에는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백일이 되면 빚을 얻어서라도 마을 잔치를 했죠. 살 수 있다는 어떤 확신을 뜻한 것이지요. 거꾸로 60년을 살면 이제 충분히 살았다는 의미로 기념을 한 것이 되지요. 그냥 시인으로서 충분히 해왔다는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내 시인 생활 60년을 특별히 되새기는 것은 좀 불편합니다.” 

 

―우리 현대시에서 시인 고은의 위치를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우리 현대시가 1908년 육당 최남선의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부터 시작해 100여 년이 지났는데, 나는 꼭 그 중간에 시작했기 때문에 앞 세대의 흔적과 유산을 이어서 넘겨 준다는 그런 의미를 스스로 갖기도 합니다. 특이하게도 육당, 공초(오상순) 등 앞 세대 시인들과 많은 친분이 있었고 그분들의 아픔도 느끼니까요. 그분들이 다 쓰지 못하고 남기고 간 세계를 내가 조금이라도 더 써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내 세계는 좀 서사적이고 직관적입니다. 괜찮은가요?(첫 질문에만 그의 설명은 춘원 이광수에서 김소월, 이상, 이육사를 망라하며 30여 분간 이어졌다.)”  

 

―60주년 기념으로 시집 대하 서사시 ‘심청’을 출간하신다고 하던데요. (그의 ‘심청’은 우리 고전 ‘심청전’을 모티브로 한 서사시로 긴 장편소설 분량이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대학에 초청받아 한 학기 동안 특강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단테의 ‘신곡’을 다시 보면서 천국-지상-지옥으로 이뤄진 구성에 흥미를 느꼈지요. 그런데 우리 심청전도 자세히 보면 하늘-지상-용궁이란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거든요. 물론 나의 심청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구상하고 쓰기 시작했지만요. 작년 여름에 원고를 넘겼는데, 어떻게 하다가 출간이 해를 넘기게 되었어요. 꼭 60주년을 자축하기 위해 쓴 것은 아닙니다.” 

 

―원래 승려이셨는데 등단을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요. 

“수행 중에 시를 좀 썼는데, ‘폐결핵’이란 시를 화가 나병재라는 친구에게 보여준 적이 있어요. 그가 보더니 ‘이것도 시냐?’ 하더라고요. ‘안 좋으면 내버려라’ 하고 잊어버렸는데, 그가 갖고 있다가 그때 막 생긴 한국시인협회 기관지 ‘현대시’에 공모 광고가 난 걸 보고 거기에 보냈는데 뽑힌 거죠. 나는 산중에 있어 전혀 몰랐어요. 당시 비구승으로 서울에서 불교신문 초대 주필을 하면서 직접 신문을 만들었는데, 잘 만들 줄 모르니까 지면에 자투리 공간이 남을 때가 많았어요. 거기에 내가 쓴 시를 넣어 메우곤 했지요. 하루는 자주 찾아오던 교통부 국장이 그 시를 보고 ‘갈 데가 있소’라고 해 따라가니 미당 서정주의 집이었어요. 미당이 내 시를 보더니 ‘이거 단번에 추천해야겠구먼’ 하더니 세 편을 한꺼번에 현대문학에 추천했어요. 그렇게 해서 1958년 한 해에 두 번이나 등단하게 된 거예요. 내 힘이 아니라 주변의 인도 덕분이었죠.”

 

―젊을 때 기자생활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1969년 내 인생에 직장이라고는 딱 한번, 몇 달 정도 동화통신이란 곳에 문화부장대우로 다닌 적이 있습니다. 문화부는 아니고 일종의 특집부의 성격인데 포천 양공주촌이나 오지 같은 데를 다니면서 기사를 썼죠. 그 회사 안에 외신기자 구락부(클럽)가 있었는데, 방에 온갖 양주가 즐비했어요. 하루는 그 술을 몰래 엄청 마시고는 다 때려 부쉈지요. 취중에 반감이 생겼나 봐요. 그랬더니 사장이 불러서 ‘고은 씨는 시인의 길을 가야겠네. 당분간 쉬게’ 했어요. 잘린 거지요. 그런데 지금도 사우회에서는 이따금 편지가 와요. 하하하.” 

 

―선생님의 작품에서는 ‘사람’이 가장 많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젊을 적에는 6·25전쟁과 학살의 극한 상황을 겪다 보니 인간의 의미를 부정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이 세상은 모두 관계로서 이뤄지고 존재한다고 봅니다. 만약 나 혼자 존재한다면 이름도 필요 없죠. 지금 이 자리도 이진구가 있으니 고은이 있는 거죠. 우리 둘이 지금 앉아 있는 것도 관계로서의 존재입니다.”

 

―다작(多作)으로도 유명하신데, 소재 부족을 느껴 보신 적은 없으신가요. 

“나보고 다작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 말을 거부합니다. 끝없이 솟구쳐 나오는 샘물을 내가 어찌 막겠어요. 세계 각처에는 작품을 산더미처럼 쓴 작가가 많습니다. 중국의 이백은 술 한 말에 시 백 편이라고 두보가 노래했지요. 괴테, 빅토르 위고 등 모두 엄청난 양의 작품을 썼습니다. 중앙아시아에는 아직도 일주일도 넘게 읽어야 하는 구비서사시가 있습니다. 한번은 몽골에서 밤 10시부터 아침까지 구비서사시를 읽는 독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는데 새벽에 해가 뜨니까 그제야 ‘끝났다’며 말젖으로 만든 술을 마시더라고요. 멋진 긴 밤이었지요. 나에게도 그런 피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내년부터 ‘운명’이라는 서사시를 쓸 계획이고, 그 뒤에도 써야 할 시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어요.” 

 

―작품이 스웨덴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세계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됐는데, 시가 번역이 참 어려운 분야 아닌지요.  

“지금 우리가 읽는 모든 외국 작품은 다 번역된 것입니다. 불경도, 성경도, 괴테의 작품도 그렇지요. 당장은 불충분할 수 있지만 시는 자기 스스로 어딘가로 나가고 싶어 하는 꿈을 갖고 있어요. 아이들이 크면 아빠 엄마의 품을 떠나 집 밖의 또 다른 세계로 나가고 싶어 하듯 말이지요. 내 시도 집에서 부모님의 사랑 속에서만 있지 않고, 바람 찬 세상 속으로 나가 노래하고 싶어 하겠죠. 그렇게 나가는 거죠.” 

 

―진부한 질문이지만 매년 노벨상 후보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대답도 진부합니다. 정말 내가 그것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단지 우리나라가 너무 노벨상에 집착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누구보다 힘든 젊은 시절을 보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젊은이들도 많이 아픈데 특별히 해주실 말이 있으신지요. (그는 젊을 적에 네 번 자살 시도를 한 바 있다) 

“그 시대에는 다 힘들게 살았는데 나만 유달리 고생했다고 하면 미안한 일입니다. 다만 전쟁을 겪으면서 내 또래 절반 가까이가 죽었는데 살아 남다 보니 일종의 죄의식이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살지 못한 삶을 조금이나마 내가 대행한다는 사명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살아왔다고 지금 젊은이들에게 ‘뭐가 힘드냐’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삶은 누가 지도하는 삶이 아니라는 걸 말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저서 ‘만인보’에 국정 농단 사건의 폭로자 고영태 씨 가족사가 실린 것이 화제가 됐습니다. (만인보는 1986∼2010년까지 쓴 4000여 편의 시를 30권으로 엮은 그의 연작시로, ‘단상3353-고규석’ ‘단상 3355-이숙자’에 나오는 고 씨와 이 씨가 고영태 씨의 부모다.)  

 “만인보의 후반 편에서는 광주학살을 많이 다루고 있는데 그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때 취재하면서 5·18민주화운동 때 남편을 잃은 여자가 리어카를 끌며 아이들을 힘들게 키웠는데, 그 아이들 중 하나가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펜싱 금메달을 땄다는 걸 알고 쓴 거지요. 나중에 만인보에 나오는 그 금메달리스트가 고영태라는 건 언론을 보고 알게 되었어요.” 

 

―박근혜 정부에서 소위 블랙리스트에 올랐습니다.  

“이름만 달랐지, 어찌 그때뿐이겠습니까. 늘 감옥이고 이중 삼중 감시를 당했으니까요. 유신시대인 박정희 전 대통령 때 내 친구가 운영하던 민음사는 나 때문에 세무조사를 당했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 때는 문인 주소록에서 나를 뺀 적도 있어요. 얘기하거나 드러나면 안 되는 기피 인물이었던 거죠. 오죽하면 승려 시절의 ‘일초(一超)’란 법명에 ‘표’ 씨를 붙여 ‘표일초’라고 해서 글을 발표하거나, 다른 호를 지어 글을 발표해야 했으니까요. 여권은 김영삼 정부 들어 사면 받으면서 처음 나왔고, 그전에는 초청을 받아도 출국을 못했습니다. 나한테 블랙리스트는 아주 익숙한 일입니다. 하하하.”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신지요. 

“앞으로도 나는 이 나라 시의 길을 이제까지 간 것처럼 갈 것입니다. 나는 운명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전혀 새롭게 펼칩니다. 아시아의 숙명 이상의 우주적 율동으로서의 운행(運行) 말입니다. 나는 그런 운명 속에서 내 시의 긴 과정을 완성할 것입니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출처]이 기사는 동아일보(http://news.donga.com)에서 작성되었습니다.
(http://news.donga.com/3/all/20180115/881645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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